김숙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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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동양포럼 대담 : 김숙자 원장

관리자
2021-11-18
조회수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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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신 분이라 시간을 할애해달라고 요청 드리기 송구스러웠습니다. 병원이 굉장히 바쁘신 모양이죠?”

▷김숙자 청주 김숙자 소아과 원장 “소아병원이다 보니 일반 병원과는 다릅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자식이 아프면 모든 걱정과 관심이 아이에게 집중되니까요.”

▷김 주간 “병원을 운영하신 지 오래되셨습니까?”

▷김 원장 “36년 전 처음 청주에 왔습니다. 당시 도립병원 소아과에 다녔는데 여자 의사라고 무시를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약이 올라 당시 원장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여자라 안 만나줘서 너무 서운합니다. 나중에 길에서 만나면 여자가 아닌 후배로서 인사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요. 이 편지를 쓰고 나서 주위 분들에게 많이 혼났습니다. 그런데 덕분에 도립병원 소아과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처음 3년은 쉬지 않고 24시간 병동을 지켰습니다. 이후 김숙자 소아과를 세웠습니다. 사실 저희 집은 가난했습니다. 늘 넉넉하지 않았죠. 그래서 아버지보다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커 병원을 열게 됐습니다. 당시 환자들도 많았어요. 근데 아이들이 자꾸 죽었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없는 것 같아 서울로 보냈습니다. 서울 병원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결과가 나오는데 아이들은 자꾸 죽었습니다. 한집에서 3명의 남자 아이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태어나면 괜찮았는데 3개월 후에 경련을 시작하다가 5~6개월 안에 남자 아이들만 죽더라고요. 죽은 아이들의 엄마가 자신이 이 남편과 계속 살아도 괜찮겠냐고 물어봤습니다. 그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계속 죽어가는데 아무도 해결해주는 사람이 없다니…제 자신이 너무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탄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갔습니다. 미국에서 소아과 레지던트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제가 한국에서는 이미 소아과 의사였기 때문에 레지던트 기간을 2년으로 단축할 수 있는 시험에 응시해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공부해보니 별로 득이 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브라질에서 열린 대사질환을 주제로 한 학회에 참석하게 됐고 거기에서 닥터 구스리를 만났습니다. 책에서만 보던 분을 직접 만나니 너무 놀라웠습니다. 한국에서는 신생아 유전병 검사를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 나왔지만 당시 한국에는 그런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그 학회에서 신생아 검사를 통해 문제를 발견한 아이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래서 닥터 구스리에게 신생아 검사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너무 나이가 많아서 직접 가르쳐줄 수 없다며 미국의 닥터 하빌리비를 소개해줬습니다. 저는 하버드대에 가게 됐고 당시 닥터 하빌리비가 신생아스크린 연구의 수장이어서 신생아스크린도 공부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전문의가 돼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걸 활용하면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한국의 현실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청주에 와서 다시 김숙자 소아과를 열게 됐습니다. 그런데 1999년 갑자기 저에게 뇌출혈이 찾아왔습니다. 환자가 된 저는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습니다. 이름 석자 쓰는 것까지도요. 퇴원을 하고 나서 삼일공원에 가서 청주를 내려다보는데 ‘아, 내가 아직 안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팬덤기계를 융자를 얻어 6억을 주고 남편 몰래 샀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들여온 것이었죠. 제 병원에서 이렇게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하니 소문도 나고 나름대로 진전과 발전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까 죽은 세 남자아이들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세 아이들도 시기적으로 간단한 검사만 했더라면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보내서 그 아이들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 내가 무식해서 아이들의 생명을 건지지 못했구나. 아까운 생명들을 헛되게 잃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김숙자 소아과 부설 유전학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제가 뇌출혈 이후 갖게 된 생각은 안 아프기만 하다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제 마비가 풀어져서 이렇게 거동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새 생명을 얻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숙자 소아병원을 만들고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제는 김숙자 병원을 법인으로 만들어서 계속 유전병을 치료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수익성이 별로 없으니까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올해부터 희귀난치성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공모한다고 해서 응모했습니다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상급종합병원만 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서 청와대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나는 희귀난치성질환을 20여년 가량 봐왔는데 상급종합병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답변은 “없다”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대형병원에 근무하지 않으면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답답했습니다.”

▷김 주간 “몇 년째 의사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김 원장 “내년이면 20년이 됩니다.”

▷김 주간 “의학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김 원장 “저는 옥천 청송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까지는 지원을 받아서 다닐 수 있었지만 저희 집이 6남매여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기를 권유 받았습니다. 주변에서 가지 말라고 하니까 더 가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희곡을 쓰고 연극도 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연극을 하면 희곡도 써줬죠. 그러던 중 한전 소장 딸을 가르칠만한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거기 가정교사가 됐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학교를 다니려고 했습니다. 강의료는 이렇게 해결했지만 입학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주실 리는 없었고 입학시험을 보는 학교에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덜컥 학교에는 합격했는데 입학금이 없으니까 울고만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시더니 돈을 빌려오셨습니다. 꾼 돈으로 입학금을 내러 갔지만 납부기간이 끝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 댁에 찾아가 사정하니 교장선생님이 농협에 전화를 해줘서 입학금을 내고 입학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희곡을 쓰며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약사였던 안철호 선배가 돈을 버는 모습을 보고 ‘아 약사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약사를 생각했지만 이왕 하려면 의사가 더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의사가 됐습니다. 사실 어떤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기 보다는 돈을 많이 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충남대를 졸업하고 그 부설병원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40살쯤 미국으로 건너가 레지던트부터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원장님은 아동난치병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 것 같은데 그렇게 아동 난치병 환자가 많습니까?”

▷김 원장 “많았지만 그동안 몰랐던 거죠. 한국에 이러한 환자들이 많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근친결혼이 빈번한 일본과 달리 법적으로 동성동본 결혼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한국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전병이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다 단군자손인데 다 근친결혼 아니냐’ 이 말을 듣고 멍 했습니다. 그래서 충북도의 도움을 받아 지적장애 시설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해보니 대다수가 선진국에서 태어났으면 치료를 잘 받고 나았을 사람들인데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아 망가져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김 주간 “그렇다면 난치병은 결국 부모의 결혼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까?”

▷김 원장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근친결혼일 경우 더 관계가 깊습니다. 친척끼리는 유전자가 비슷합니다. 이미 나쁜 유전자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나쁜 것끼리 만나니 문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김 주간 “그렇다면 가능한 먼 관계의 사람들끼리 만나야 한다는 옛 말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봐도 되는 것입니까?”

▷김 원장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경우 근친혼이 많은데 섬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바다를 건너 결혼한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 주간 “결국 인간의 생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원장 “솔직히 깊은 뜻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우선 제가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의사 가운을 입고 아픈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저에게는 기적이요 가장 큰 보람이자 행복입니다.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김 주간 “그러면 의사란 어떤 인간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원장 “단지 의사 되는 데만 만족한다면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면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실력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면 다른 의사들 보다 훨씬 많이 노력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존경 받는 의사가 되고 싶다면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따라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사로 살고 싶은가는 그래서 자신의 욕심이나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김 주간 “유전병이라고 하면 부모가 포기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가 낳은 생명에 대해 건전하고 정상적이면 소중히 여기지만 결함이 있고 불완전한 경우에는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김 원장 “보통 유전병이라고 말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더 안쓰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더 이상 고통 받지 말고 자신보다 하루라도 먼저 갔으면 하는 생각을 하더라고요.”

▷김 주간 “하버드대에 에릭슨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첫 아들이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그 아들은 수용소에 보내고 다른 아이들은 잘 키워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애아로 태어난 큰 아들이 격리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자녀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하버드에서 세미나를 개최했을 때 그의 딸이 저에게 “아버지를 믿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아버지는 지탄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왜냐하면 생명을 차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랍니다. 온전한 생명은 중요하게 여겼지만 결함이 있는 생명은 버렸다. 이것이 자기에게 상처를 줘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릭슨의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지만 그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제가 잘 아는 여성은 결혼 하자마자 낳은 아이가 중도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지요. 그러다 그 아이를 데리고 산에 들어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산을 개간해 자연농장을 만들어 살았습니다. 암환자 요양소도 만들고 일본 최고의 의사들을 모셔다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여성의 삶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은 대략 25년 정도 정말 고생했습니다. 에릭슨이라는 세계적 학자는 자기가 낳은 생명에 결함이 있다고 버렸고 일본의 한 여성은 결함을 안고 태어난 자식을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 많은 생명을 보살피는 사람이 됐습니다. 지금 그 딸아이가 40세가 됐는데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지금은 그곳이 생명존중의 성지가 됐습니다. 저도 강연 때문에 거기에 갔었는데 그 아이의 거실을 둘러보고 그 두 손을 잡고 그저 기도를 올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더라고요. 이제 그분은 자연농원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생명과 연결돼 있다는 생명철학으로 저와 의기투합이 됐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 결함을 가진 아이들을 부모가 포기하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결함 있는 아이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아이도 성가시단 이유로 때리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생명의 가치가 존중되지 않고 생명무가치 시대가 됐습니다. 자기의 기대에 맞는 아이만 선호하는 이런 현상이 만연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생명이 고갈되어 가는 시대의 최전선에서 생명가치를 수호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절망적인 형편에 놓이게 되었을 때 환자와 환자 가족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원장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이라고 봅니다. 어머니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8년간 말 한마디 못하시다 4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동료 의사들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편히 가시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래도 좋으니 하루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가 힘이 없으시더라고요. 엄마를 살려보겠다는 신념이 있었을 때는 그렇게 강건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두달 전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그렇게 정정하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까 끈이 끊긴 느낌이었습니다.”

▷김 주간 “저도 일본에서 오랫동안 여러 번 만났던 일본대학 긴급구명의료센터장으로 맹활약 하던 분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환자나 환자의 가족들이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근원적 생명력이 작동해서 치유 곤란한 환경에서도 기적적으로 회생할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오 헨리라는 작가의 ‘마지막 잎새’의 이야기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저는 83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연구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학식이나 지위, 명예보다는 다른 생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그 사람의 인격이 숨김없이 나타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말입니다. 병마와 싸우시는 어머님을 위해 선생님께 하셨다는 아버님의 말씀이나 취한 행동이 정말 인간다운 인간의 품성을 지니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립니다. 인간의 가치가 물질의 가치보다 낮아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아버님의 일상 언행과 어머님의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헌신적 간호에서 생명 가치의 지고성과 숭고성에 깨우침을 얻고 그래서 그것을 실천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생명문화도시를 지향하는 청주에서 선생님의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의 생명을 하나라도 더 건지고 싶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오랜만에 늙은 마음이 따뜻하게 살아나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원장 “감사합니다.”

 

자료출처 : 동양일보 ((8)동양포럼 대담 : 유봉기 대표, 안철호 대표, 김숙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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