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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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 또 불러도 그리운 이름, 어머니

관리자
2021-11-18
조회수 710

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충북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의 젖줄 보청천이 흐르고 있는 곳에 자리한 작은 시골에서 태어
났다. 집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는 모래무지며 피라미, 꺽지 등 여러 민물고기가 살고 있어서 틈만 나면 동생들과 고무신을 이용해 물고기를잡기도 하고 멱도 감았고, 봄날이면 뒷산에 올라가 버들피리를 만들어불곤 하였다.

경북 김천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던 어머니는 14살 때 안타깝게도 내 외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힘들고 외로운 생활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18살 때 6살 위였던 아버지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결혼 후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국군으로 징집되어 몇 년간 집에 돌아오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입대하자 어머니는 한겨울의 냉기 어린 방에서 홀로 출산을 하였는데, 갓난아기인 나를 차마 차가운 방바닥에 눕히지 못하고 당신의 배 위에 올려놓으셨다고 한다. 살 길이 막막했던 어머니는 나를 낳은 지 삼칠일이 되기도 전에 벼를 빻아 떡을 만들어 광주리에 이고는 팔러 다녔다. 변변한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해 본인 몸도 힘들었을 텐데 등에는 나를 업고 머리에는 무거운 광주리까지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떡 좀 사세유!” 하였던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아려온다.어머니는 떡장사도 하고 텃밭도 일구고 남의 집 일도 거들면서 아버지가 없는 집을 지키셨다.

내가 아버지를 처음 만나게 된 건 네 살 되던 1950년 12월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를 보면서 동네 사람들은 숙자 아버지가 기적같이 살아 돌아왔다며 자신들의 일인 양 모두 기뻐하였다. 아버지는 자신을 둘러싸고 환영해주던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나와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숙자야, 아버지다. 네 아버지다” 하는 사람들의 부추김을 받아 한없이 낯설기만 한 아버지에게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아버지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내가 아버지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나를 번쩍 들어 올려 힘껏 안아주셨다. 그 전에도 삼촌이나 아저씨들이 안아준 적이 있었지만 그때처럼 강렬한 느낌이 들었던 건 처음이었다. 비록 네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였지만 아버지의 체온을 통해 안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숙자로 불리고 있긴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아버지가 지은 이름으로 호적에 올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네 살이 될 때까지 숙자로 불리고 있던 상황이다 보니 다른 이름으로 바꾼다는 게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한 부모님은 김숙자로 호적에 올렸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엔 “왜 그때 예쁜 이름으로 바꿔주지
않았어요?” 하고 불평도 했지만 지금은 ‘김숙자’란 이름이 나에게 가장잘 어울리는 이름이 되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농사를 짓기도 하고 틈틈이 건축 미장일과 구들을 놓아 방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셨는데, 평소 자식들에게는 엄격하였지만 남에게는 인정이 많은 분이셨다. 아버지가 돌아온 이후 내 아래로 다섯 형제가 더 태어나 우리는 여덟 식구가 되었다. 한때는 아버지가 힘들게 일궈 만든 과수원 덕분에 넉넉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이년이 채 안 되어 너도 나도 과수원 경작을 하면서 형편이 다시 어려워졌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온갖 일을 다 하셨다. 그리고 그런 궁핍한 속에서도 나를 위해 교육보험까지 들어주셨다.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동생들을 보살피고 거두는 게 내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과수원으로 일하러 가시고 나면 집은 우리 세상이 되었다. 비록 먹을거리가 곤궁했던 시절이지만 다행히 과일만큼은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그 외에 특별한 간식거리가 없었던 우리는 풀빵을 구워먹는가 하면 햇밀을 씻어 소다나 당원을 넣고 가마솥에 볶은 뒤 아버지 어머니 몰래 숨겨놓고 먹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해가 기울어가면 동생들을 데리고 산비탈에 있는 과수원에가서 놀곤 하였다. 매일 밤마다 과수원에는 고라니며 노루, 멧돼지 같은 산짐승들이 내려왔다. ‘부우엉’ 부엉이 울음소리에 동생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서로 부둥켜안고 숨을 죽였다가도 그 모양이 우스워 다음날 서로 놀려대곤 하였다. 여름방학이 되면 동생들과 보릿대로 여치집을 만들면서 놀기도 하였다. 그때엔 사소한 일에 티격태격하기도 많이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것이 그립고 애틋하기만 하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가 가장 그립다.

2004년 8월, 어머니는 우리 육남매를 위해 고향 청성에서 직접 채취한 꿀을 싸들고 오셨었다. 그때가 어머니와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었다. 그날 고향으로 돌아가시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뇌를 심하게 다쳐 아프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온기없는 냉방에서 홀로 나를 낳고 당신 배 위에 핏덩이인 나를 눕혀서 재웠다는 어머니. 밤마다 잠을 줄여가며 뜨개질한 스웨터를 입혀주고, 동생들이 잠들었을 때 금방 낳은 따뜻한 날계란을 몰래 건네주던 어머니.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게 되어 화장실에서 울고있을 때 오천구십 원을 빚내어 내 손에 쥐어 주셨던 어머니.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전에는 그저 구슬픈 유행가인 줄만 알았던 ‘사모곡’이란 이 노래 가사가 점점 더 가슴에 사무친다. 2011년 8월 30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던 날에 나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비행기가 연착되어 기차를 타지 못하고 작은 호텔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게 되었다. 살짝 잠든 사이 핑크색 영롱한 안개빛을 보았다. 그리고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많은 세월을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자식으로서 의사로서 고쳐 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냥 죄스러웠다. 더욱이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자식이 되었기에 더 괴로웠다. 싸늘하게 식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우리 육남매는 어머니의 인생이 가여워서 울고, 어머니에게 죄송해서 또 울었다.

어머니, 다음 생은 몸과 마음이 모두 평안할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나시길 소망합니다. 어머니는 저희 자식들에게 부족하게 해주어 늘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저희 육남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부족함 없는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죽을 때까지 당신을 그리워하며 사랑할 것입니다. 어머니, 우리를 낳아주고 사랑으로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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