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 1년차였던 1976년, 그 해 겨울에 나는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임신했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위 레지던트 선생님께서 1년차 때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레지던트 한 명이 허리디스크 문제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가 갑자기 법이 바뀌어 군대에
다시 가야 해서 레지던트 수가 모자란 데다가 그때 마침 치프 레지던트가 공교롭게도 치질 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임신 6개월이 넘은 몸으로 일주일에 5일은 당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임신중독증에 걸려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부어 발에 맞는 신발을 찾기 어려워 샌들을 신어야 했다. 여기저기 뚫려 있는 샌들 사이로 부은살집이 그대로 다 삐져나와 한겨울의 추위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대로 쉬지 못해서 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어디에서든 눈꺼풀이 감기고
잠이 쏟아졌다.하루는 의국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응급실에 환자가 들어왔다고 연락이 왔다. 바로 내려간다고 대답을 해놓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기다리다 못한 응급실 당직 선생님이 쫓아 올라와 발로 문짝을 차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깨었다.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요!”이렇게 긴박한 상황에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원망이 눈에 가득했다. 천근만근의 몸으로 얼핏 잠이 들었다가 깬 나는 응급실로 내려갈 때
까지도 밀려오는 졸음을 채 떨쳐버리지 못했었다. 그러다 아이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여섯 살 정도의 아주 귀엽게 생긴 사내아이였는데, 아무리 청진기를 대 보아도 심장 뛰는 소리는 들리는데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전혀 자가호흡이 없는데 입술에 청색증이 나타나지 않았다.“석션! 산소! 인공호흡 준비! 빨리 가져와!”
다급히 소리를 지르며 암부백(ambu-bag)으로 인공호흡을 시키는 한편 포도당과 전해질이 들어 있는 수액을 연결했다. 수액에는 응급상황에 사용되는 에피네프린과 스테로이드를 섞어 투여했다. 아이의 부모는 외출 중이어서 이웃사람의 연락을 받고 뒤늦게 응급실로 달려왔다고 했다. 진찰을 하면서 응급실에 오기 전에 아이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모에게 물어보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했다. 아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호흡수, 심장 박동수, 혈압 등의 바이탈 사인을 확인했다. 다행히 몸은 따뜻했고 열은 없었으며 혈압은 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까진동공이 빛에 반응하고 있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통증에 대한반응은 전혀 없다. 기도에 이물질이나 가래가 있지는 않았지만 흡입기로 입에 고여 있는 침을 제거하고 목이 꺾이지 않게 펴서 호흡이 편하게 들어가도록 체위를 유지해주었다.
아이에게 암부백으로 인공호흡을 했다. ‘곧 괜찮아지겠지’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지켜보면서, 아이 부모에게 아이의 출생 후부터의 병력과 가족 중 유전병을 의심할 만한 병은 없었는지 확인하였다. 그런데 아이는 그 동안 전혀 아팠던 적도 다친 적도 입원한 적도 없던 건강한 아이였다.
아이는 계속 인공호흡을 해도 심장은 뛰는데 눈을 뜨지 않았고, 여전히 통증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상황에서 살아날 사람들은 대개 30분 이내에 깨어났다. 그런데 30분이 훨씬 지나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다리는 더 퉁퉁 붓고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처럼 힘들었지만 아이에게서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뇌에 산소 공급이 오 분 이상 되지 않으면 뇌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온 신경이 곤두섰다. ‘제발… 제발…’ 마음속으로 빌면서 아이의 숨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심장만 뛰고 자가호흡이 돌아오지 않았다. 워낙 긴급한 상황이었던지라 그때까지 나는 잠깐이라도 앉아 숨을 고를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의 상태가 좀처럼 나아지질 않고 시간만 흘러갔다. 차츰 내 몸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가 잠시도 앉아 있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내 몸이 너무 힘드니 ‘도대체 왜 안 깨어나는 거야!’ 하는 불평이 슬며시 고개를 들다가 잦아들었다. 땅으로 꺼져 들어갈 듯한 무거운 몸을 추슬러 아이에게 다시 30분 이상 인공호흡을 했다. 꿈쩍도 안 했다. 전혀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죽는 사람들은 항문이 열리는데 이 아이는 항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인공호흡기를 차마 뗄 수 없었다.
아이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는 인공호흡을 지속하고, 사망이 확인되었을 때 영안실로 옮기라는 지시를 하고 당직실로 올라가 깜박 잠이 들었다. 길지 않은 시간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깨자마자 아이 생각에 부리나케 응급실로 뛰어 내려갔다. 예상했던 대로 침대는 비어 있었다.또 한 명의 아이가 세상을 떠났구나, 하는 생각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몇 시에 영안실로 옮겼나요?” 응급실 담당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저기 있잖아요”하며 손가락으로 침대 밑을 가리켰다. 거기엔 방금 전까지 의식이 없던아이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놀고 있었다. 다시 진찰해 보았다. 의식도 정상이고 의사 표현도 잘했다. 아이를 보니 기쁜 마음과 함께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믿어지질 않았다. 의사로서 어떻게 설명하기도 어려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오 분 이상 숨을 쉬지 않으면 뇌에 완전히 손상이 온다는 의학 지식이 잘못된 것 같았다.
내가 암부백을 일찍 그만두었더라면 이 아이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병력도 없고 건강한 아이가 이렇게까지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면 아마도 부모가 없는 사이에 어른들이 사용하는 어떤 약을 먹지 않았을까 추측이 되었다. 괜찮아지긴 했지만 아이의 약물중독에 대한 검사를 통해 원인을 파악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입원을 권유했다. 하지만 아이 부모는 사양하고 곧바로 아이와 병원을 떠났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본다. 그 아이는 무엇 때문에 갑자기 그렇게 되었을까, 약물중독이라면 어떤 약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질 않는다. 임신과 함께 바쁘고 힘들었던 레지던트 시절이었지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그 아이를 치료하며 얻은 교훈이 있다. 어떠한 응급상황에서도 환자의 목숨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라는 것이다.
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 1년차였던 1976년, 그 해 겨울에 나는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임신했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위 레지던트 선생님께서 1년차 때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레지던트 한 명이 허리디스크 문제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가 갑자기 법이 바뀌어 군대에
다시 가야 해서 레지던트 수가 모자란 데다가 그때 마침 치프 레지던트가 공교롭게도 치질 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임신 6개월이 넘은 몸으로 일주일에 5일은 당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임신중독증에 걸려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부어 발에 맞는 신발을 찾기 어려워 샌들을 신어야 했다. 여기저기 뚫려 있는 샌들 사이로 부은살집이 그대로 다 삐져나와 한겨울의 추위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대로 쉬지 못해서 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어디에서든 눈꺼풀이 감기고
잠이 쏟아졌다.하루는 의국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응급실에 환자가 들어왔다고 연락이 왔다. 바로 내려간다고 대답을 해놓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기다리다 못한 응급실 당직 선생님이 쫓아 올라와 발로 문짝을 차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깨었다.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요!”이렇게 긴박한 상황에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원망이 눈에 가득했다. 천근만근의 몸으로 얼핏 잠이 들었다가 깬 나는 응급실로 내려갈 때
까지도 밀려오는 졸음을 채 떨쳐버리지 못했었다. 그러다 아이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여섯 살 정도의 아주 귀엽게 생긴 사내아이였는데, 아무리 청진기를 대 보아도 심장 뛰는 소리는 들리는데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전혀 자가호흡이 없는데 입술에 청색증이 나타나지 않았다.“석션! 산소! 인공호흡 준비! 빨리 가져와!”
다급히 소리를 지르며 암부백(ambu-bag)으로 인공호흡을 시키는 한편 포도당과 전해질이 들어 있는 수액을 연결했다. 수액에는 응급상황에 사용되는 에피네프린과 스테로이드를 섞어 투여했다. 아이의 부모는 외출 중이어서 이웃사람의 연락을 받고 뒤늦게 응급실로 달려왔다고 했다. 진찰을 하면서 응급실에 오기 전에 아이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모에게 물어보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했다. 아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호흡수, 심장 박동수, 혈압 등의 바이탈 사인을 확인했다. 다행히 몸은 따뜻했고 열은 없었으며 혈압은 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까진동공이 빛에 반응하고 있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통증에 대한반응은 전혀 없다. 기도에 이물질이나 가래가 있지는 않았지만 흡입기로 입에 고여 있는 침을 제거하고 목이 꺾이지 않게 펴서 호흡이 편하게 들어가도록 체위를 유지해주었다.
아이에게 암부백으로 인공호흡을 했다. ‘곧 괜찮아지겠지’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지켜보면서, 아이 부모에게 아이의 출생 후부터의 병력과 가족 중 유전병을 의심할 만한 병은 없었는지 확인하였다. 그런데 아이는 그 동안 전혀 아팠던 적도 다친 적도 입원한 적도 없던 건강한 아이였다.
아이는 계속 인공호흡을 해도 심장은 뛰는데 눈을 뜨지 않았고, 여전히 통증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상황에서 살아날 사람들은 대개 30분 이내에 깨어났다. 그런데 30분이 훨씬 지나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다리는 더 퉁퉁 붓고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처럼 힘들었지만 아이에게서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뇌에 산소 공급이 오 분 이상 되지 않으면 뇌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온 신경이 곤두섰다. ‘제발… 제발…’ 마음속으로 빌면서 아이의 숨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심장만 뛰고 자가호흡이 돌아오지 않았다. 워낙 긴급한 상황이었던지라 그때까지 나는 잠깐이라도 앉아 숨을 고를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의 상태가 좀처럼 나아지질 않고 시간만 흘러갔다. 차츰 내 몸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가 잠시도 앉아 있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내 몸이 너무 힘드니 ‘도대체 왜 안 깨어나는 거야!’ 하는 불평이 슬며시 고개를 들다가 잦아들었다. 땅으로 꺼져 들어갈 듯한 무거운 몸을 추슬러 아이에게 다시 30분 이상 인공호흡을 했다. 꿈쩍도 안 했다. 전혀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죽는 사람들은 항문이 열리는데 이 아이는 항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인공호흡기를 차마 뗄 수 없었다.
아이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는 인공호흡을 지속하고, 사망이 확인되었을 때 영안실로 옮기라는 지시를 하고 당직실로 올라가 깜박 잠이 들었다. 길지 않은 시간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깨자마자 아이 생각에 부리나케 응급실로 뛰어 내려갔다. 예상했던 대로 침대는 비어 있었다.또 한 명의 아이가 세상을 떠났구나, 하는 생각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몇 시에 영안실로 옮겼나요?” 응급실 담당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저기 있잖아요”하며 손가락으로 침대 밑을 가리켰다. 거기엔 방금 전까지 의식이 없던아이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놀고 있었다. 다시 진찰해 보았다. 의식도 정상이고 의사 표현도 잘했다. 아이를 보니 기쁜 마음과 함께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믿어지질 않았다. 의사로서 어떻게 설명하기도 어려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오 분 이상 숨을 쉬지 않으면 뇌에 완전히 손상이 온다는 의학 지식이 잘못된 것 같았다.
내가 암부백을 일찍 그만두었더라면 이 아이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병력도 없고 건강한 아이가 이렇게까지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면 아마도 부모가 없는 사이에 어른들이 사용하는 어떤 약을 먹지 않았을까 추측이 되었다. 괜찮아지긴 했지만 아이의 약물중독에 대한 검사를 통해 원인을 파악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입원을 권유했다. 하지만 아이 부모는 사양하고 곧바로 아이와 병원을 떠났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본다. 그 아이는 무엇 때문에 갑자기 그렇게 되었을까, 약물중독이라면 어떤 약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질 않는다. 임신과 함께 바쁘고 힘들었던 레지던트 시절이었지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그 아이를 치료하며 얻은 교훈이 있다. 어떠한 응급상황에서도 환자의 목숨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