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촌에 파견 근무를 하게 된 건 1977년, 첫 아이를 낳던 해였다. 무의촌이란, 말 그대로 의사가 없는 오지를 말한다. 대부분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6개월을 의무적으로 무의촌에서 진료를 봐야 전문의자격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북한에는 무의면이 없다. 따라서 남한에도 무의면은 없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의사가 없는 면 소재지마다 전공의를 파견 근무하게 하였다.
그 즈음 나는 충남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전공의가 부족하여 출산한 지 5일 만에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한 채 당직근무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때 나는 임신중독으로 고생하다 출산 예정일을 보름 앞두고 제왕절개를 하여 출산을 한 상태였다. 다리는 출산 후에도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고 젖몸살이 심해 양팔을 들기조차 힘이 들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수련 부장님을 찾아가 어차피 거쳐야 할 무의촌 근무 과정이니 하루라도 빨리 파견을 보내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렇게해서 출산 후 두 달도 되지 않아 무의촌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원래 대부분의 무의촌 파견은 연고가 있거나 여자일 경우 집과 가까운 곳으로 파견 근무를 시키는 게 통례인데 나는 연고지와 전혀 상관이 없는 충남 서천군 시초면 보건지소로 발령을 받았다.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기를 포대기에 싸안고 서천행 버스에 올랐다.
창 밖으로 추수를 앞둔 벼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판이 풍성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시골버스는 들판과 산이 바라보이는 험한 길을 네 시간이나 걸려 서천에 도착했다. 서천군 보건소장에게 인사를 한 후 시초면 보건지소로 향했다. 아담한 보건지소에는 환자를 진료하고 처치할 수 있는 대여섯 평쯤 되는 작은 공간의 진료실과 잠을 잘 수 있는 숙직실, 그리고 뒤로 돌아가면 연탄아궁이가 있는 허름한 부엌이 전부였다. 부엌에는 수도도 없어서 보건지소 밖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그렇게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밥과 빨래는 말할 것도 없고 하루에도 수십 장씩 생기는 아기 빨랫감과 아기 목욕 등등 일일이 물을 길어 쓸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며칠동안 고심하다 아기를 대전에 있는 집으로 데려다 놓고 돌아왔다. 두달밖에 안 된 아기를 떼어놓고 왔더니, 밤이 되면 아기 얼굴이 아른거리고 보고 싶은 마음에 밤새 뒤척이다 아침을 맞는 날이 많았다. 끼니때가 되면 연탄불에 음식을 해먹기도 불편해 대충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내가 왜 무의촌 진료를 서둘렀나 후회도 되었지만 몇 개월 지내다 보니 마을 사람들과 친해져서 위안이 되었다. 보건지소 옆에는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식품들을 사면서 마을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사람들은 텃밭에서 직접 기른 배추와 무, 감자와 고구마를 쪄서 갖고 오기도 했다. 마을의 어느 집에 잔치가 있다거나 특별한 음식을 하게 되면 항상 나를 불러 주었다. 그렇게 모여서 정담을 나누면서 함께 먹었던 음식들이 지금도 가끔 그립다. 특히 애호박을 송송 썰어 넣고 홍두깨로 밀어 만든 구수한 칼국수와 수제비, 시루떡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렇게 때론 엄마처럼 때론 언니처럼 살펴주고 감싸주는 가족 같은 마을 사람들 덕분에 공중보건의 생활을 잘해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가을이 깊어 갔다. 보건지소는 초라했지만 그런 대로 급한 환자를 보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약품들을 정리했다. 보건지소에는 평소에 써보지도 않은 생소한 약들이 많았다. 약을 모두 꺼내어 무슨 약인지 확인을 한 다음 꼼꼼히 설명서를 읽고 약 용량과 성분을 정리해서 알아보기 쉽도록 하나하나 벽에 붙여 놓으면 한눈에 들어와 꺼내 쓰기가 편했다.
마을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 평소에도 환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오는 환자 중에는 만성폐질환 환자도 있었고, 두피에 종기가 난 걸 내버려둬서 머리 전체가 고름으로 덮여 있는 아기 환자도 있었다. 머리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고름이 계속 나왔다. 마을에서 병원이 멀다 보니 대부분의 환자들이 증상을 키워 만성이 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제때 치료도 받지 못하고 영양실조에 걸린 아기를 보면서 여기가 한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촌 진료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산부인과 경험이 없는 내가 시골 보건지소에서 분만하는 산모를 도와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급하게 아기가 나와 어디로 보낼 상황도 아니었고 태어나 “응애응애” 우는 갓난아기를 바라보며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탯줄을 묶으려고 봉합사를 찾아보니 큰 상자에 가득했다. 몇 센티미터 정도의 실을 잘라 탯줄을 묶어 처치했는데 다행히도 잘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백지장처럼 핏기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키가 크고 깡마른 창백한 얼굴의 아가씨가 오빠의 등에 업혀 찾아왔다. 오랫동안 치료를 하지 않아 죽음에 임박한 폐결핵 환자였다. 아가씨는 진료실 침대에 누워 힘없는 목소리로 “오빠, 한 번만 안아줘!” 하였는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말은 아가씨의 마지막 부탁이 되고 말았다.
폐결핵은 조기에 치료하면 완치가 가능한 병이었음에도 시기를 놓쳐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며 의사로서 한없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의료시설이 부족하고 무지한 곳에서는 가벼운 질환으로도 사람들이 얼마든지 죽어갈 수 있다는 현실을 통감했다. 입동이 지나며 서서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은 추위가 더 빨리 찾아왔다. 하루는 근무를 마치고 연탄아궁이에 불을 넣고 깊은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 심한 두통으로 잠이 깼다.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면서
어질어질하고 터질 듯 머리가 아팠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마침 그날은 남편이 보건지소에 와 있었기에 서둘러 나를 대전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하여 응급조치로 회복할 수 있었다. 방바닥의 갈라진 틈새로 연탄가스가 나왔던 것이다.
연탄가스 사고가 난 후 군 보건소에 숙직실을 수리해 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곧바로 쉽게 고쳐주지 않았다. 언제 또 연탄가스가 샐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곳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서천군 시초면 보건지소는 의사가 없는 공백 상태가 한 달이나 지속되었다. 내가 없어서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을 마을 사람들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생각 끝에 충남도청 보건과를 찾아가 보건과장에게 연탄가스 중독에 걸렸던 이야기를한 다음 빠른 수리를 부탁했다. 알았으니 기다리라는 답변을 받았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무렵, 주민으로부터 서천 보건지소에 의사가 없다는 진정서가 들어가자 군 보건소와 경찰서에서 나에게 확인차 연락이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서천 보건소로부터 연탄가스가 새지 않도록 방바닥을 고쳐놓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서둘러 보건지소로 돌아가 보니 시멘트가 발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바닥
은 발이 시리도록 차가웠고 벽에는 냉기가 돌았다. 어쨌든 연탄가스가 더는 새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연탄불을 피워 아궁이에 밀어 넣었으나 마르지 않은 시멘트 방바닥이 언제 따뜻해질지 몰랐다. 너무 추워서 발만 동동 구르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진료실에 가보니 소독 약품들도 모두 얼어 있었다. 진료실을 나오다가 환자 대기실에 있는 석유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저 걸로 냉방에 온기라도 불어넣어야겠다 싶어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난로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난로의 석유가 새어나와 불이 바닥으로 옮겨가더니 방바닥 장판으로 순식간에 붙어 버렸다. 방바닥이 타면서 불길은 유리창을 타고 나갔고 시커먼 연기는 보건소 건물 전체에 가득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맨발로 보건소 옆집 가게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마을 방송으로 불이 난 사실을 알리자 집집마다 사람들이 물을 가지고 나와서 불을 꺼주었다.
방바닥은 시커멓게 타 버렸고 유리창은 모두 깨져 버렸으며 연기에 그을린 보건지소는 한순간에 초토화가 되어 버렸다. 파출소로 불려가 조서를 받았다. 조사하는 경찰은, 여의사 혼자 시골에 와서 고생이 많다며 위로하더니, 그래도 정부의 재산인 보건지소에 화재를 낸 것은 형사 사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조서가 끝난 후 불이 난 보건지소를 내 사비를 들여 고쳐야 했다.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건물의 탄 흔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흰 페인트를 바르고 또 발랐다.
유리창은 새 것으로 교체하고 타 버린 문짝은 사다가 다시 끼워 맞췄다. 그 달의 월급은 수리비로 전액을 쓰고도 더 보태야 했다. 갑자기 적지 않은 지출을 하게 되니 남편에게 낯도 안 서고 도와주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죄송했다. 다행히 한 해가 가기 전에 모든 수리를 말끔하게 끝낼 수 있었다. 다른 보건지소로 발령을 받고 1977년 12월 마지막 날 짐을 정리하려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타다 만 옷가지와 모자, 책 등 대충 짐을 챙겨 대전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그리운 가족들과 만나게 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버스 안에 있다 보니 허기가 밀려왔다. 버스가 잠깐 휴게소에서 정차한 사이 금방 구워낸 따끈따끈한 호떡 세 개를 사 들고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호떡을 한 입 베어 무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 동안의 고생과 외로움과 추위에 떨던 날들이 모두 스치며 서러움이 밀려왔다. 집을 떠나 객지에서 혼자 살아냈던 그 6개월은 그만큼 외롭고 힘들었다. 버스가 점점 멀어질수록 마을 사람들의 친절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그때 하필이면 버스 안에서 <작별>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어디 간들 잊으리오 두터운 우리 정
다시 만날 그날 위해 축배를 올리자
잘 가시오 잘 있으오
축배를 든 손에
석별의 정 잊지 못해 눈물을 흘리네 영화 <애수>의 주제곡 ‘auld lang syne’을 우리말로 번안한 노래였다.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의 이별 장면에서 흐르던 이 곡을 버스 안에서 들으며 어느새 내 볼은 젖어가고 있었다.
무의촌에 파견 근무를 하게 된 건 1977년, 첫 아이를 낳던 해였다. 무의촌이란, 말 그대로 의사가 없는 오지를 말한다. 대부분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6개월을 의무적으로 무의촌에서 진료를 봐야 전문의자격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북한에는 무의면이 없다. 따라서 남한에도 무의면은 없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의사가 없는 면 소재지마다 전공의를 파견 근무하게 하였다.
그 즈음 나는 충남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전공의가 부족하여 출산한 지 5일 만에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한 채 당직근무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때 나는 임신중독으로 고생하다 출산 예정일을 보름 앞두고 제왕절개를 하여 출산을 한 상태였다. 다리는 출산 후에도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고 젖몸살이 심해 양팔을 들기조차 힘이 들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수련 부장님을 찾아가 어차피 거쳐야 할 무의촌 근무 과정이니 하루라도 빨리 파견을 보내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렇게해서 출산 후 두 달도 되지 않아 무의촌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원래 대부분의 무의촌 파견은 연고가 있거나 여자일 경우 집과 가까운 곳으로 파견 근무를 시키는 게 통례인데 나는 연고지와 전혀 상관이 없는 충남 서천군 시초면 보건지소로 발령을 받았다.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기를 포대기에 싸안고 서천행 버스에 올랐다.
창 밖으로 추수를 앞둔 벼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판이 풍성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시골버스는 들판과 산이 바라보이는 험한 길을 네 시간이나 걸려 서천에 도착했다. 서천군 보건소장에게 인사를 한 후 시초면 보건지소로 향했다. 아담한 보건지소에는 환자를 진료하고 처치할 수 있는 대여섯 평쯤 되는 작은 공간의 진료실과 잠을 잘 수 있는 숙직실, 그리고 뒤로 돌아가면 연탄아궁이가 있는 허름한 부엌이 전부였다. 부엌에는 수도도 없어서 보건지소 밖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그렇게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밥과 빨래는 말할 것도 없고 하루에도 수십 장씩 생기는 아기 빨랫감과 아기 목욕 등등 일일이 물을 길어 쓸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며칠동안 고심하다 아기를 대전에 있는 집으로 데려다 놓고 돌아왔다. 두달밖에 안 된 아기를 떼어놓고 왔더니, 밤이 되면 아기 얼굴이 아른거리고 보고 싶은 마음에 밤새 뒤척이다 아침을 맞는 날이 많았다. 끼니때가 되면 연탄불에 음식을 해먹기도 불편해 대충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내가 왜 무의촌 진료를 서둘렀나 후회도 되었지만 몇 개월 지내다 보니 마을 사람들과 친해져서 위안이 되었다. 보건지소 옆에는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식품들을 사면서 마을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사람들은 텃밭에서 직접 기른 배추와 무, 감자와 고구마를 쪄서 갖고 오기도 했다. 마을의 어느 집에 잔치가 있다거나 특별한 음식을 하게 되면 항상 나를 불러 주었다. 그렇게 모여서 정담을 나누면서 함께 먹었던 음식들이 지금도 가끔 그립다. 특히 애호박을 송송 썰어 넣고 홍두깨로 밀어 만든 구수한 칼국수와 수제비, 시루떡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렇게 때론 엄마처럼 때론 언니처럼 살펴주고 감싸주는 가족 같은 마을 사람들 덕분에 공중보건의 생활을 잘해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가을이 깊어 갔다. 보건지소는 초라했지만 그런 대로 급한 환자를 보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약품들을 정리했다. 보건지소에는 평소에 써보지도 않은 생소한 약들이 많았다. 약을 모두 꺼내어 무슨 약인지 확인을 한 다음 꼼꼼히 설명서를 읽고 약 용량과 성분을 정리해서 알아보기 쉽도록 하나하나 벽에 붙여 놓으면 한눈에 들어와 꺼내 쓰기가 편했다.
마을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 평소에도 환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오는 환자 중에는 만성폐질환 환자도 있었고, 두피에 종기가 난 걸 내버려둬서 머리 전체가 고름으로 덮여 있는 아기 환자도 있었다. 머리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고름이 계속 나왔다. 마을에서 병원이 멀다 보니 대부분의 환자들이 증상을 키워 만성이 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제때 치료도 받지 못하고 영양실조에 걸린 아기를 보면서 여기가 한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촌 진료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산부인과 경험이 없는 내가 시골 보건지소에서 분만하는 산모를 도와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급하게 아기가 나와 어디로 보낼 상황도 아니었고 태어나 “응애응애” 우는 갓난아기를 바라보며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탯줄을 묶으려고 봉합사를 찾아보니 큰 상자에 가득했다. 몇 센티미터 정도의 실을 잘라 탯줄을 묶어 처치했는데 다행히도 잘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백지장처럼 핏기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키가 크고 깡마른 창백한 얼굴의 아가씨가 오빠의 등에 업혀 찾아왔다. 오랫동안 치료를 하지 않아 죽음에 임박한 폐결핵 환자였다. 아가씨는 진료실 침대에 누워 힘없는 목소리로 “오빠, 한 번만 안아줘!” 하였는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말은 아가씨의 마지막 부탁이 되고 말았다.
폐결핵은 조기에 치료하면 완치가 가능한 병이었음에도 시기를 놓쳐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며 의사로서 한없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의료시설이 부족하고 무지한 곳에서는 가벼운 질환으로도 사람들이 얼마든지 죽어갈 수 있다는 현실을 통감했다. 입동이 지나며 서서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은 추위가 더 빨리 찾아왔다. 하루는 근무를 마치고 연탄아궁이에 불을 넣고 깊은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 심한 두통으로 잠이 깼다.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면서
어질어질하고 터질 듯 머리가 아팠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마침 그날은 남편이 보건지소에 와 있었기에 서둘러 나를 대전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하여 응급조치로 회복할 수 있었다. 방바닥의 갈라진 틈새로 연탄가스가 나왔던 것이다.
연탄가스 사고가 난 후 군 보건소에 숙직실을 수리해 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곧바로 쉽게 고쳐주지 않았다. 언제 또 연탄가스가 샐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곳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서천군 시초면 보건지소는 의사가 없는 공백 상태가 한 달이나 지속되었다. 내가 없어서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을 마을 사람들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생각 끝에 충남도청 보건과를 찾아가 보건과장에게 연탄가스 중독에 걸렸던 이야기를한 다음 빠른 수리를 부탁했다. 알았으니 기다리라는 답변을 받았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무렵, 주민으로부터 서천 보건지소에 의사가 없다는 진정서가 들어가자 군 보건소와 경찰서에서 나에게 확인차 연락이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서천 보건소로부터 연탄가스가 새지 않도록 방바닥을 고쳐놓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서둘러 보건지소로 돌아가 보니 시멘트가 발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바닥
은 발이 시리도록 차가웠고 벽에는 냉기가 돌았다. 어쨌든 연탄가스가 더는 새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연탄불을 피워 아궁이에 밀어 넣었으나 마르지 않은 시멘트 방바닥이 언제 따뜻해질지 몰랐다. 너무 추워서 발만 동동 구르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진료실에 가보니 소독 약품들도 모두 얼어 있었다. 진료실을 나오다가 환자 대기실에 있는 석유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저 걸로 냉방에 온기라도 불어넣어야겠다 싶어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난로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난로의 석유가 새어나와 불이 바닥으로 옮겨가더니 방바닥 장판으로 순식간에 붙어 버렸다. 방바닥이 타면서 불길은 유리창을 타고 나갔고 시커먼 연기는 보건소 건물 전체에 가득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맨발로 보건소 옆집 가게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마을 방송으로 불이 난 사실을 알리자 집집마다 사람들이 물을 가지고 나와서 불을 꺼주었다.
방바닥은 시커멓게 타 버렸고 유리창은 모두 깨져 버렸으며 연기에 그을린 보건지소는 한순간에 초토화가 되어 버렸다. 파출소로 불려가 조서를 받았다. 조사하는 경찰은, 여의사 혼자 시골에 와서 고생이 많다며 위로하더니, 그래도 정부의 재산인 보건지소에 화재를 낸 것은 형사 사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조서가 끝난 후 불이 난 보건지소를 내 사비를 들여 고쳐야 했다.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건물의 탄 흔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흰 페인트를 바르고 또 발랐다.
유리창은 새 것으로 교체하고 타 버린 문짝은 사다가 다시 끼워 맞췄다. 그 달의 월급은 수리비로 전액을 쓰고도 더 보태야 했다. 갑자기 적지 않은 지출을 하게 되니 남편에게 낯도 안 서고 도와주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죄송했다. 다행히 한 해가 가기 전에 모든 수리를 말끔하게 끝낼 수 있었다. 다른 보건지소로 발령을 받고 1977년 12월 마지막 날 짐을 정리하려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타다 만 옷가지와 모자, 책 등 대충 짐을 챙겨 대전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그리운 가족들과 만나게 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버스 안에 있다 보니 허기가 밀려왔다. 버스가 잠깐 휴게소에서 정차한 사이 금방 구워낸 따끈따끈한 호떡 세 개를 사 들고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호떡을 한 입 베어 무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 동안의 고생과 외로움과 추위에 떨던 날들이 모두 스치며 서러움이 밀려왔다. 집을 떠나 객지에서 혼자 살아냈던 그 6개월은 그만큼 외롭고 힘들었다. 버스가 점점 멀어질수록 마을 사람들의 친절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그때 하필이면 버스 안에서 <작별>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어디 간들 잊으리오 두터운 우리 정
다시 만날 그날 위해 축배를 올리자
잘 가시오 잘 있으오
축배를 든 손에
석별의 정 잊지 못해 눈물을 흘리네 영화 <애수>의 주제곡 ‘auld lang syne’을 우리말로 번안한 노래였다.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의 이별 장면에서 흐르던 이 곡을 버스 안에서 들으며 어느새 내 볼은 젖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