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무렵,
페이스북 메시지로 누군가 계속 나를 찾았다. 무심하게 지나치곤 했는데
또 다시 닥터 Sook Kim을 찾는다는 메시지가 떴다. 혹시 미국 매사추세츠 제너럴 병원에 있을 때
내가 진료했던 단풍당뇨병 환자인 수잔인가 싶어 답글을 남겼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짐작대로 수잔이었다. 대학을 다니는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처음 내가 매사추세츠 제너럴 병원에서 수잔을 만난 건 1998년으로, 수잔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다.
피부가 희고 고운 데다 눈이 커서 인형처럼 예뻤다.
<김숙자 원장 미국 마사추세츠 제너럴병원 근무시절 단풍당뇨병을 가진 수잔과 함께>
※ 단풍당뇨증(Maple syrup urine disease, MSUD) 이란 아미노산 대사이상 질환이다.
아미노산 중에 로이신, 이소로이신, 발린 등의 분지형 아미노산의 효소 결핍으로 초래된다.
단풍당뇨증을 치료를 받지 않으면 저혈당, 대사성 산혈증, 신경계 손상, 혼수,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대사이상 검사를 하기 위해 병원에 온 아이는 주사바늘에 익숙해 있어서인지 태연하게 손가락을 내밀며 피를 뽑으라고 했었다. 랜싯으로 손가락을 찌른 후 모세관이 연결된 혈액 튜브 끝으로 흘러나오는 혈액을 대어보니 작은 튜브 하나가 채워졌다. 매우 작은 원심분리기를 이용하여 혈액을 돌리자 혈액과 혈청이 정확하게 분리되었다. 아주 작은 양의 혈장으로도 검사를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한국에서는 검사를 하려면 피를 많이 뽑아야 했기 때문에 그런 의료 현실이 부럽고 신기했다. 피를 뽑고 나서 수잔은 팝콘과 포테이토칩을 세어 먹으며, 음식에서 자신이 대사할 순 없지만 꼭 필요한 아미노산 루신이 얼마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예쁜 것만 아니고 총명하기까지 한 아이였다. 내가 자신을 귀여워한다는 걸 아는 수잔 역시 나를 잘 따랐다. 수잔은 크리스마스나 명절 같은 때에 특히 입원이 잦았다. 외동딸로 태어난 수잔은 태어나자마자 신생아 스크리닝 검사로 대사질환이 있다는 게 밝혀져 바로 치료에 들어갔기 때문에 뇌손상을 입지 않았다.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말을 조금 더듬었다. 수잔은 아프지 않은 때에도 나를 자주 찾아왔다.
1998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수잔이 토하면서 몸이 축 늘어지는 증상을 보였다. 대사 위기가 온 것이다. 자신의 병에 익숙해진 수잔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자기 소변을 받아 주었다. 수잔 엄마가 소변의 DNPH 검사를 직접 해서 노란 알갱이들이 침전되어 있는 혼탁도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단풍당뇨 환자에게서 루신 수치가 500이 넘으면 소변의 DNPH 검사가 양성으로 나오기 때문에 혈액 검사를 하지 않아도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함께 보낼 때에도 여전히 대사질환 환자들은 응급상황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우리 같은 의사들은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ㅡ크리스마스 낭만을 생각할 수 없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도 그랬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찰하고 혈액을 뽑아 네이비 야드의 아무도 없는 검사실로 가서 기계를 켜고 검사물을 투입하여 결과가 나올 때까지 5시간 이상을 혼자서 기다려야 했다.무서울 정도로 적막한 검사실에는 검사 프로토콜과 두툼한 환자 차트가 책꽂이에 가득 꽂혀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환자들의 차트를 넘겨보면서 어떤 환자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살펴보았다. 평생 피를 뽑으며 살아가야 할 환자들, 크리스마스에도 병원에 올 수밖에 없는 수잔 같은 환자가 너무 많았다.
검사 결과가 나와 아미노산 분석기에서 결과지를 프린트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검사 결과가 제발 나쁘지 않게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던 수잔이의 바람과는 달리 결과가 좋지 않았다. 루신이 정상치의 열 배 이상 높아 뇌부종을 일으킬 정도였으며 급하면 투석 을 해야 할 응급상황이었다. 검사지를 들고 병동으로 갔더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수잔이, 여러마리의 말들이 끄는 마차가 보인다고 했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뇌부종으로 인해 수잔에게 헛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잔의 부모는 수잔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관찰하고 기록했다. 수잔에게 식이요법과 수액 치료를 병행했다.
매일 수잔의 상태와 아미노산 검사에 따라 처방을 바꾸며 대사 위기가 끝날 때까지 수잔에게 신경쓰느라 내 개인생활은 거의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좋아져서 퇴원을 할 때는 10여 일의 입원 기간에 늘어난 짐이 밴에 가득 찰 정도였다. 아플 때에도 보고 아프지 않을 때에도 보면서 수잔과 나는 점점 정이 들었다. 단풍당뇨 가족모임에도 수잔네 가족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매번 수잔은 화사하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왔다. 수잔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그렇게 항상 공주처럼 예쁘게 꾸며 주었다. 늘 아픈 딸인 만큼 더 잘 입히고 먹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 사랑을 받아서인지 수잔은 늘 밝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할 때에는 “미국에서 계속 살면 안돼요? 한국에 안 가면 안 돼요?” 하면서 크게 실망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선 서로 바쁘다 보니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었다. 페이스북에서 14년 만에 수잔의 최근 얼굴을 보니 몰라보게 많이 자랐다. 수잔은 보스턴에 있는 웬트워스 공과대학교에 다니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잠시 휴학을 하였는데 다음 학기엔 복학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수잔에게 한국에 한 번 오라고 하니 비행기 타는 게 무서워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고 했다. 지금도 아플 때면 병원에 가곤 하는데 예전의 담당 의사였던 비비안 쉬는 병원을 떠나서 다른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오게 되면 자신을 꼭 만나고 가라고 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잔과 소식을 주고받는 사이 수잔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수잔은 예쁜 소녀에서 어느새 아름다운 여대생이 되어 있었고 이제는 학사졸업을 하여 의젓한 사회인이 되었다.
“수잔,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날 잊지 않고 찾아주어서 고맙다.”
<2016년 수잔의 학사졸업사진>
수잔에게 한국에 한 번 오라고 하니 비행기 타는 게 무서워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고 했다. 지금도 아플 때면 병원에 가곤 하는데 예전의 담당 의사였던 비비안 쉬는 병원을 떠나서 다른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오게 되면 자신을 꼭 만나고 가라고 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잔과 소식을 주고받는 사이 수잔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수잔은 예쁜 소녀에서 어느새 아름다운 여대생이 되어 있었고 이제는 학사졸업을 하여 의젓한 사회인이 되었다.
“수잔,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날 잊지 않고 찾아주어서 고맙다.”
2010년 11월 무렵,
페이스북 메시지로 누군가 계속 나를 찾았다. 무심하게 지나치곤 했는데
또 다시 닥터 Sook Kim을 찾는다는 메시지가 떴다. 혹시 미국 매사추세츠 제너럴 병원에 있을 때
내가 진료했던 단풍당뇨병 환자인 수잔인가 싶어 답글을 남겼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짐작대로 수잔이었다. 대학을 다니는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처음 내가 매사추세츠 제너럴 병원에서 수잔을 만난 건 1998년으로, 수잔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다.
피부가 희고 고운 데다 눈이 커서 인형처럼 예뻤다.
<김숙자 원장 미국 마사추세츠 제너럴병원 근무시절 단풍당뇨병을 가진 수잔과 함께>
※ 단풍당뇨증(Maple syrup urine disease, MSUD) 이란 아미노산 대사이상 질환이다.
아미노산 중에 로이신, 이소로이신, 발린 등의 분지형 아미노산의 효소 결핍으로 초래된다.
단풍당뇨증을 치료를 받지 않으면 저혈당, 대사성 산혈증, 신경계 손상, 혼수,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대사이상 검사를 하기 위해 병원에 온 아이는 주사바늘에 익숙해 있어서인지 태연하게 손가락을 내밀며 피를 뽑으라고 했었다. 랜싯으로 손가락을 찌른 후 모세관이 연결된 혈액 튜브 끝으로 흘러나오는 혈액을 대어보니 작은 튜브 하나가 채워졌다. 매우 작은 원심분리기를 이용하여 혈액을 돌리자 혈액과 혈청이 정확하게 분리되었다. 아주 작은 양의 혈장으로도 검사를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한국에서는 검사를 하려면 피를 많이 뽑아야 했기 때문에 그런 의료 현실이 부럽고 신기했다. 피를 뽑고 나서 수잔은 팝콘과 포테이토칩을 세어 먹으며, 음식에서 자신이 대사할 순 없지만 꼭 필요한 아미노산 루신이 얼마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예쁜 것만 아니고 총명하기까지 한 아이였다. 내가 자신을 귀여워한다는 걸 아는 수잔 역시 나를 잘 따랐다. 수잔은 크리스마스나 명절 같은 때에 특히 입원이 잦았다. 외동딸로 태어난 수잔은 태어나자마자 신생아 스크리닝 검사로 대사질환이 있다는 게 밝혀져 바로 치료에 들어갔기 때문에 뇌손상을 입지 않았다.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말을 조금 더듬었다. 수잔은 아프지 않은 때에도 나를 자주 찾아왔다.
1998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수잔이 토하면서 몸이 축 늘어지는 증상을 보였다. 대사 위기가 온 것이다. 자신의 병에 익숙해진 수잔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자기 소변을 받아 주었다. 수잔 엄마가 소변의 DNPH 검사를 직접 해서 노란 알갱이들이 침전되어 있는 혼탁도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단풍당뇨 환자에게서 루신 수치가 500이 넘으면 소변의 DNPH 검사가 양성으로 나오기 때문에 혈액 검사를 하지 않아도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함께 보낼 때에도 여전히 대사질환 환자들은 응급상황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우리 같은 의사들은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ㅡ크리스마스 낭만을 생각할 수 없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도 그랬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찰하고 혈액을 뽑아 네이비 야드의 아무도 없는 검사실로 가서 기계를 켜고 검사물을 투입하여 결과가 나올 때까지 5시간 이상을 혼자서 기다려야 했다.무서울 정도로 적막한 검사실에는 검사 프로토콜과 두툼한 환자 차트가 책꽂이에 가득 꽂혀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환자들의 차트를 넘겨보면서 어떤 환자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살펴보았다. 평생 피를 뽑으며 살아가야 할 환자들, 크리스마스에도 병원에 올 수밖에 없는 수잔 같은 환자가 너무 많았다.
검사 결과가 나와 아미노산 분석기에서 결과지를 프린트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검사 결과가 제발 나쁘지 않게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던 수잔이의 바람과는 달리 결과가 좋지 않았다. 루신이 정상치의 열 배 이상 높아 뇌부종을 일으킬 정도였으며 급하면 투석 을 해야 할 응급상황이었다. 검사지를 들고 병동으로 갔더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수잔이, 여러마리의 말들이 끄는 마차가 보인다고 했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뇌부종으로 인해 수잔에게 헛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잔의 부모는 수잔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관찰하고 기록했다. 수잔에게 식이요법과 수액 치료를 병행했다.
매일 수잔의 상태와 아미노산 검사에 따라 처방을 바꾸며 대사 위기가 끝날 때까지 수잔에게 신경쓰느라 내 개인생활은 거의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좋아져서 퇴원을 할 때는 10여 일의 입원 기간에 늘어난 짐이 밴에 가득 찰 정도였다. 아플 때에도 보고 아프지 않을 때에도 보면서 수잔과 나는 점점 정이 들었다. 단풍당뇨 가족모임에도 수잔네 가족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매번 수잔은 화사하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왔다. 수잔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그렇게 항상 공주처럼 예쁘게 꾸며 주었다. 늘 아픈 딸인 만큼 더 잘 입히고 먹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 사랑을 받아서인지 수잔은 늘 밝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할 때에는 “미국에서 계속 살면 안돼요? 한국에 안 가면 안 돼요?” 하면서 크게 실망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선 서로 바쁘다 보니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었다. 페이스북에서 14년 만에 수잔의 최근 얼굴을 보니 몰라보게 많이 자랐다. 수잔은 보스턴에 있는 웬트워스 공과대학교에 다니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잠시 휴학을 하였는데 다음 학기엔 복학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수잔에게 한국에 한 번 오라고 하니 비행기 타는 게 무서워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고 했다. 지금도 아플 때면 병원에 가곤 하는데 예전의 담당 의사였던 비비안 쉬는 병원을 떠나서 다른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오게 되면 자신을 꼭 만나고 가라고 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잔과 소식을 주고받는 사이 수잔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수잔은 예쁜 소녀에서 어느새 아름다운 여대생이 되어 있었고 이제는 학사졸업을 하여 의젓한 사회인이 되었다.
“수잔,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날 잊지 않고 찾아주어서 고맙다.”
<2016년 수잔의 학사졸업사진>
수잔에게 한국에 한 번 오라고 하니 비행기 타는 게 무서워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고 했다. 지금도 아플 때면 병원에 가곤 하는데 예전의 담당 의사였던 비비안 쉬는 병원을 떠나서 다른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오게 되면 자신을 꼭 만나고 가라고 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잔과 소식을 주고받는 사이 수잔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수잔은 예쁜 소녀에서 어느새 아름다운 여대생이 되어 있었고 이제는 학사졸업을 하여 의젓한 사회인이 되었다.
“수잔,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날 잊지 않고 찾아주어서 고맙다.”